개혁신앙과 교회사적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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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9-09-22 20:58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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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디는 1903. 8월 한국의 성령부흥 운동은 1907년 절정에 이르렀고 1910년 100만명 구령운동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현실을 도외시한 내세적 신앙으로 몰고 가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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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앙과 교회사적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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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인용문에서 `서로 약조가 있다`고 한 내용은 무엇을 뜻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갑신정변 이후 일본의 노력으로 한국의 선교활동의 거점을 확보한` 미국측 선교사들은 교인들의 정치적 현실참여로 선교의 문이 막힐까 매우 염려한 것으로 보인다.
선교사들의 비정치, 중립정책은 1907년 초대총감인 이또오가 주한 선교사 회의에 참석해서, `나는 한국내 일본인들의 부정을 막는데 힘쓰겠지만 한국인의 교사이며 지도자인 여러분들은 전력으로 한국인들의 부당한 행동을 방지하도록 협조해 줄 것을 믿고 있따` 고 연설함과 동시에 1905년 이후 계속되는 반일운동, 의병운동을 막아 달라고 당부하였다. 이렇게 을사보호조약 이후 교인들 사이에 반일감정이 높아지자 하디(R. A. Hardie)는, `이러한 정치적 교회적 상황에서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성령의 세례를 받는 길 밖에는 이 난경을 돌파할 길이 었다.` 라는 비난이 쏟아졌으나, 그렇게 비난하던 장로교의 스미스(W. Smith)까지도 1908년 보고서에 `...그러…(투비컨티뉴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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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특히 1905. 9. 9 대한매일신보에서 `시야에 하등인민이 관리의 침어를 불감하야 교회를 의뢰하다가, 금야에는 왜인의 학대가 비상하므로 교회를 의지한다`고 analysis(분석) 한 대로 기독교의 개종이 정치적 피신 목적에서 비롯됨과 이로 인해서 결국 교인들의 교회를 통해서 반일반정부 행동을 취할 것을 매우 우려하였다. 서광선 박사와 김용복 박사는 1907년 대부흥회는 민족 감정이 비정치화 의도라고 보았는데, 이러한 비판은 전혀 타당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때로부터 선교사들은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다고 강조하게 된다 물론 일본제국의 3등훈장까지 받았던 감리교의 감독 해리스(M. C. Harris)에 상대하여는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일본정부의 요원이다.`고 하였다.